이 글은 제프 자비스의 ‘Death to the mass(es)’에서 영감, 논평 거리를 얻어 시작하게 됐습니다.


대중매체는 Mass와 Media라는 단어의 조합이다. 이 뻔하고도 익숙한 합성어를 우리는 미디어를 통칭하는 용어로 쉽게 사용하고 있다. 매스미디어 혹은 매스컴, 즉 대규모의 오디언스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인 미디어 형태를 이 범주 안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대중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소홀하다. 그 대중은 여전히 주체로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표도 던지지 않는다. 모든 미디어는 대중미디어라는 관성적 이해 속에서 지금의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바라보고 정의한다.

미디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담론과 토론은 비교적 풍성하다. 급변하는 기술적 환경 속에서 미디어의 범위를 새롭게 정의하고 경계 지으려는 시도들도 활발하다. 여전히 칼같이 잘라낼 수 있는 구분선을 확정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서서히 가까워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아니다. 어쩌면 구분선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내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모든 것이 미디어이기에 미디어 아닌 것을 정의하는 것이 더 빠르다는 주장도 가능해진 세상이다. 그러나 유독 대중이라는 합성어의 한 축을 해체하고 재정의하려는 노력은 그리 눈에 띄진 않는다.

대중은 단 한마디로 정의하기엔 복잡하고 난해하다. 여기서 대중은 Crowd나 mob 등이 아니라 Mass로만 한정한다. Mass의 어원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은 문화 사회학자 레이먼드 윌리엄스에 기댈 필요가 있다. 그가 편찬한 ‘키워들 : 문화와 사회의 어휘집’에는 대중의 의미에 대한 풍성한 역사적, 계보적 설명이 첨부돼있기에 그렇다. 윌리엄스의 설명에 따르면, 대중은 상스럽고 무지한 무리들이라는 의미의 다중(multitude)과 ‘밀집한 집합’이라는 긍정적 의미의 대중이라는 뜻이 혼재돼 공존하고 있었다고 했다.

image 포드의 생산공장. 출처 https://research-methodology.net/wp-content/uploads/2016/05/Fordism-Neo-Fordism.jpg

그러다 1920년대 대량 생산(mass production) 체계가 포드주의로 확립되면서 대중이라는 의미에 또 한번의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긍정성의 탈색과 수량적 의미로의 가치 격하가 진행됐다고 볼 수 있다.

“대중이란 용어의 20세기 용법 중 가장 심각한 곤경이 분명해진다. 단단한 집합체를 표시했으며 (좋든 싫든) 여전히 이를 표시하고 있는 이 단어는, 이제 아주 많은 수의 사물이나 사람들을 뜻한다. 아주 많은 수라는 의미가 전체적으로 우세해졌다. 대중교통(mass communication)과 대중매체(mass media)는 이전의 모든 체계와는 다르게 직접 대중들(군집한 개인들)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수적으로 아주 많지만 개별 가정에서 상대적으로 고립된 수많은 청중을 상대로 한다.”(Williams, 1983, ; p.192-193)

19세기말 20세기에 걸친 자본주의의 변동, 다시 말해 테일러리즘과 포디즘으로 이어지는 생산관계의 급격한 변화가 대중이라는 의미에 영향을 미치면서, 정치사회적 의미로서의 대중은 수량적 다수 집단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중매체를 뜻하는 매스미디어(Mass Media)는 대중이라는 역사적 의미 변화 속에서 포디즘적 체계가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형성됐다고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엘리트 집단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무지한 인민들의 집합으로서 대중과 대중들(The Masses)이라는 의미도 함께 사용됐을 것이다. 이를테면, 오르테가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과 같은 대중사회론자 담론 지형이 그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대중과 대중매체의 관계 성립

앞서 설명했다시피, 대중매체라는 단어의 보편적 쓰임은 1920년대 이후에 나타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구글 엔그램 뷰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00년대 간간히 ‘매스 미디어’라는 표현이 등장하긴 했지만 확립된 정의, 보편적 정의로 사용됐다고는 보기 어렵다. 실제로 매스 미디어라는 표현은 1930년대 이후에나 하나의 미디어적 용어로서 다뤄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매스 미디어라는 표현 자체가 대량생산의 등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윌리엄스의 설명에서도 나타나고 있듯, 미디어와 결합한 대중의 의미는 대량생산의 소비자로서 숫자화된 대규모의 균질 집단이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그 균질 집단은 어리석고 무지하며 상대적으로 고립된 하지만 정치적, 경제적 실체로서 지배력을 확장하고 있는 정치적 주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매스미디어는 이러한 대중들에게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계몽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니체나 가세트의 대중회의주의와 결합(원용진, 2010, p.135)돼 있으면서도 지배계급의 이식과 주입이라는 마르크스주의도 교묘하게 뒤섞인 의미로 대중매체의 위상이 해석됐다고 볼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정의가 확립된 대중매체는 제어 위기에 놓인 대중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라는 해석에서 자유롭지 않다. 특히 대량생산이 양산한 소비의 제어 위기 관점에서 분석한 베니거의 설명도 이를 뒷받침한다.

“기계식 인쇄기로 제작돼 철도로 유통되는 인쇄 매체는 방송 기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지배적인 대중 매체였는데, 이 역시 소비 제어의 위기가 한창일 때 다방면으로 크게 혁신됐다. 최초의 전기식 인쇄기(1839), 윤전기(1846), 목재 펄프와 넝마를 사용한 종이 제작법 및 곡면 연판의 도입(1854), 접지기(1856), 기계식 조판기(1857), 고속 인쇄 및 접지 기술의 발전(1875), 주조 식자기(1886) 등이 대표적인 예다.”(Beniger, 1986/2009, p.373)

결과적으로 대중매체라는 정의 속에는 대중을 제어하기 위한 엘리트적 의식이 반영돼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엘리트의 통제에서 탈주하려는 대중들을,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통제의 체계 속에 다시 묶어두고 질서화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대중매체였다는 사실을 역사적 흐름이 잘 보여주고 있다.

페이크뉴스와 대중매체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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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하고 어리석었던 통제불가’의 대중은 자율성의 방향으로 끊임없이 질주해왔다. 또 한 가지 방향을 덧붙이면 다양성이다. 자율성과 다양성은 대중이라는 벡터가 지닌 방향성이다. 다양성은 자율성의 기반 위에서 자신만의 견해 획득에서 출발했다. 그 흔적은 가세트의 진술에서 비교적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유럽 역사에서 일반대중이 매사에 어떤 ‘견해’를 자신이 갖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신앙과 전통, 경험, 격언, 그리고 습관적인 생각은 갖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사물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를테면 정치나 문학에 대한 이론적인 견해를 자신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중략) 그에 반해 오늘날의 평균인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리고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 매우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래서 경청하는 습관을 잃어버렸다.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이미 갖고 있는데 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이제는 들을 때가 아니라 판단하고 판결하며 결정할 때이다. 눈이 멀고 귀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회생활에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고 간여한다.” (Ortega. 1933/2005. p. 98~99.)

하지만 통제를 위한 미디어의 진화 방향은 그 역으로 발전돼왔다. 1900년대 초 급속히 늘어나던 신문의 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통제의 효율성을 위해 집중되는 흐름으로 나아갔다. 매체의 수는 줄어들었고, 다양성도 위축되었다. 균질화한 집단으로서 대중에 효율적으로 도달하기 위해 인수합병이 장려됐고 이 과정에서 미디어 다양성은 희생의 대상이 됐다. 대중은 더 높은 자율성을 기대했고, 더 넓은 다양성을 바랐지만 미디어 환경은 그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디지털은 대중의 기대를 폭발시킨 기폭제였다. 기계 복제에서 디지털 복제 시대로 넘어가면서 정보는 폭증했다. 자율성과 다양성을 갈망하던 대중들은 디지털화가 낳은 기술의 진입장벽 하락을 마음껏 향유했다. 스스로 매체를 만들었고, 스스로 메시지를 유통했다. 정보 습득의 경로 의존성도 해체되기 시작했다. 엘리트들의 계몽 체계에서 벗어나려던 욕망의 원심력은 디지털 기술과 결합하면서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대중의 기대에 역행하며 집중화하던 대중매체는 점차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대중을 단일하고 균질화된 주체로 상정하여 제어의 위기에 대처하려는 관성은 자율성과 다양성이라는 대중의 원심력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졌다. 서서히 추락하던 대중매체의 신뢰도는 디지털 단계에선 급전직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들을 제어 대상으로 삼았던 구체제에 대한 대중의 반란이 디지털이라는 무기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페이크 뉴스는 제어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놓여있는가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대중의 정치적 의식을, 소비적 경향을 더 이상 제어할 수 없게 됐다는 역사적 기점을 페이크 뉴스는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베니거식으로 표현하면 새로운 제어 혁명이 도래할 시점에 당도한 것이다.

네트워크화한 개인들과 ‘점멸적 존재‘로서 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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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환경과 제어 조건의 변화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다. 대중이라는 주체의 변화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1920년대 이후의 대중과 디지털 환경에 위치한 대중은 이미 서로 다른 위상과 권력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새로운 대중의 형태를 지시하는 용어들을 들자면, 증대된 역량의 개인들(벤클러), 네트워크 개인주의(베리 웰먼), 네트워크 사회성(비텔) 등이 있다. 대중을 대체하려는 이러한 개념들의 이면에는 네트워크 정보사회라는 이전과는 구별되는 사회체계의 등장을 전제로 한다. 카스텔의 ‘네트워크 사회론’은 대중의 변화가 기반하고 있는 사회적 구성체의 성격을 규명한 대표 저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엘리트의 대척점에 서 있던 대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균질적이고 획일적인 양의 집단으로서 대중도 없다. 견해와 개성을 지닌 개인이 존재하고 이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돼있으며 협력을 통해 시너지를 확장한다. 블록체인과 같은 P2P 기술이 사회의 기반으로 자리잡고 있는 흐름은 대중의 소멸을 표식하는 징후다. 이제 대중이라는 개념은 분산된 개인들이 연결될 때 나타났다가 흩어지면 사라지는 ‘점멸의 존재’로서만 남게 될 것이다.

‘점멸적 존재’로서 개인 혹은 대중에게 획일적인 정보는 무용하며 무가치하다. 엘리트의 소비나 통치 제어를 위한 입에 발린 교화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에 유용하며 그들의 권력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맞춤형 정보가 절실하게 부상하는 이유와 근거가 여기에 있다. ‘연결됨’에만 주목한다면 여전히 획일적 정보의 생산에만 집착할 것인지만, ‘개인’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들의 다양한 관심과 유익에 에너지를 집중하게 될 것이다. 연결됨과 개인은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허버트 갠즈의 조언을 지금도 유효하다.

“만약 기자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직업적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좀더 노력하기를 원한다면, 하향식 뉴스의 비중과 권력의 개입을 줄이기 위해 뉴스의 생산 라인을 어떻게 재조정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라는 허버트 갠즈의 조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Ganz, 2003/2008, p.133)

제어의 위기와 미디어

image 역사적으로 진행돼온 매스미디어에 대한 신뢰의 하락 경향성. 출처 http://pressthink.org/wp-content/uploads/2012/04/trustchart.png

가세트가 우려했던 무지한 대중의 권력 획득은 완성됐다. 니체가 염려했던 ‘균질화된 대중’(원용진, p.132)은 극복의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다. “비지성적이며 충동적이며 문화적으로도 가치가 없는 낮은 수준의 문화”로 가득찰 것이라는 가세트의 우려도 현실화하진 않았다. 지금도 대중을 향해 mass라는 용어보다 폭도나 어중이떠중이(rabble)라는 표현으로 경시하는 관점을 갖고 있는 수많은 언론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대중매체적 관점에서 현재의 제어 위기를 극복하고 싶어한다. 그들의 시도는 실패했고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제어 혁명이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제어와 탈제어, 재제어로 이어지는 역사적 순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네트워크 정보사회에서 대중이 아닌 연결된 개인들을 어떤 방식으로 제어할지 지금으로선 알길이 없지만, 적어도 대중매체적 방법론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100년 전 형성된 ‘대중매체의 신화’와 정의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지금의 변화한 미디어 생태계를 이해하는 첫 번째 걸음이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 원용진. (2010). 새로 쓴 대중 문화 의 패러다임. 한나래 출판사.
  • Beniger, J. (1986). The control revolution: Technological and economic origins of the information society. Harvard university press. 윤원화 옮김. (2009). 컨트롤 레벌루션 : 현대자본주의의 또다른 기원. 현실문화
  • Gans, H. J. (2003). Democracy and the News. Oxford University Press. 남재일 역. (2008). 저널리즘, 민주주의에 약인가 독인가. 강.
  • Ortega, Y. G. J. (1933). The revolt of the masses. 황보영조 옮김. (2005). 대중의 반역. 역사비평사.
  • Williams, R. (1976). Keywords: A Vocabulary of Culture and Society, Revised Ed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