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티에 따르면 우리는 현존하는 저널리즘 문화, 아니 저널리즘 자체의 불멸성을 확신할 수도 없고 또 저널리즘이 반드시 영원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 된다.(p.68)

  • 저널리즘도 하나의 문화 양식이다. 변화가 낙원의 상실을 의미하며 그래서 이(저널리즘)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초주의적이고 환원론적 입장이라면 이와 달리 변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회복되어야 할 본래의 것이 부재함을 인정하는 것을 반정초주의적이고 반환원론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p.68)

한국 저널리즘에 대하여

  • 갠즈의 지적처럼 오늘날 시민들은 대형 사건이 아니면 뉴스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곧 저널리즘 뉴스와 민주주의 관계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 그러나 합리적 공중의 무지 이론이 곧바로 민주주의 이론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거나 저널리즘 무용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무지가 전반적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으리만큼 이러한 사실이 문화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친 민주주의라는 규범적 합의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p.71)

  • 다시 말하면 저널리즘이 대체로 친 민주주의적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우호적 문화를 확산하거나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 특히 전통 저널리즘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정보 제공도 중요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보다 더 자유나 평등 도는 상호존중과 같은 민주주의 문화의 특정한 도덕적 요구 사항을 만족시키는 문제가 더욱 중요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p.72)

리프만의 주장

“신문의 힘은 지금까지 민주주의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약하다. 국민주권의 대변이라는 짐을 모두 짊어지기에는 신문은 너무 약하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자들이 신문의 본래적인 속성이라고 생각하는 자발적으로 진실을 전달하는 역할을 감당할 충분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한다.”

2) 저널리즘의 숙의는 가능한가

  • 대체로 한국의 전통적인 저널리즘과 저널리스트는 지사형이었다. 국권상실과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시대적 상황은 한국인들이 이와 의를 구별해서 따지기 어렵게 만들었다.(p.77)
  • 한국 저널리즘은 아직도 이 공리주의와 그 직계 손인 프라그마티즘을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지 못하고 있다고 필자는 느낀다.
  • 숙의 민주주의라는 관념은 한국 저널리즘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인데 그 이유는 이렇게 의무론적 전통과 정서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p.78)
  •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저널리즘 현상의 이론연구자들이 보다 고상한 차원의 이론을 추구하는 것을 아카데미즘의 속물주의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좀 지나친 자기비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숙의민주주의와 저널리즘

  • 숙의민주주의는 숙의를 민주주의의 핵심적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저널리즘 분야에서도 숙의를 위해 이상적인 공론장을 주장한다. 그러나 민주주의 이론으로 거론되는 숙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러 전제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중의 하나는 숙의에는 시민들 상호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서의 존중이라는 상호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과연 그런가?(p. 79)
  • 능력 없는 시민들은 숙의의 공개장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고 이는 오히려 불평등하고 비민주적인 결과를 낳는다.
  • 이런 면에서 숙의민주주의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민주주의를 배신하는 자기파괴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 민주주의의 주창자 무페의 비판은 더욱 존재론적이라는 의미에서 특별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과 라캉의 무의식의 언어학에 의지해 그녀는 하버마스의 이상적 커뮤니케이션 상황이라는 관념을 비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