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된 엘리티들은 자신들에게 시간 절약을 해주는 서비스와 기계들을 구매한다. 이들은 사회 전반에서 경제합리성을 갖지 못한 활동의 발전을 장려할 것이다. 이 노예 노동은 정당이 완전 고용의 바람직함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기 때문에 정치권에서도 적극적으로 장려된다. 완전고용 논자들은 수행해야만 하는 노동이 얼마나 비인간적인가에 상관 없이 어떤 직업이라도 직업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한다.”(Gorz, 1988, critique of economic reason)

문순홍은 “힘든 노동을 찬양하고 노동과 삶은 동일한 것일 수 있다는 주장은 평생동안 안정된 고숙련, 고임금 일자리를 독점하고 있는 특권 엘리트 노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정당화되어온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했다. 현재 국내에서 심화하고 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역할 분화 나아가 계급 분화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다. 고르는 노동의 이원화를 끊임 없이 강조하는데, 이유는 간명하다. “소수의 엘리트 노동자들이 자산의 여가 시간 확보를 위해 실업 상태의 노동자들을 경제합리성에도 어긋날 정도의 저임금으로 재고용하면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인 하인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머신러닝이 지배하게 될 시대로 진입할수록 고르의 통찰과 해법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에게 로봇화는 기존 노동자 계급의 특권을 강화하는 시스템이다. 이 구조 속에서 특권화된 노동 엘리트들은 안정된 고용이 보장해주는 “권력과 사회적 위신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국내 정규직, 폭넓게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존 노동자 계급은 문순홍의 표현을 빌리면 “생산이 자동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특권화된 소수가 되어 자본주의를 부정할 힘을 상실”했다. 더이상 혁명 주체로 나설 수 있는 동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이 고르가 말하는 오늘날 좌파의 문제이며 구 노동계급의 위기다.

고르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노동의 해방을 통해 탈산업사회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타율 노동을 자활노동으로 변형하는 것 그것이 새로운 사회주의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임노 관계라는 굳건한 틀에 묶여서는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는 진단이기도 했다.

그가 말하는 대안 체제는 “근대형 노동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고, 우리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해야만 하는 노동 시간을 단축시키고 창조적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한 자유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더이상 노동이 곧 삶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빠져 자동화의 저주에 갇힐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노동의 해방을 스스로 구축해가자는 주문이다. 이를 위해 그는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주장하며 새로운 협력적 경제 질서를 주창하고 있다. “본래적 의미의 노동을 회복할 때에만, 노동기반 사회를 넘어선 자활활동 기반 사회라는 미래를 열 수 있다”는 얘기다.

참고 문헌

  • 문순홍 (2001). 앙드레 고르: 현대 자본주의 비판과 사적 영역의 재탈환 정치. 문화과학, 27, 225-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