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업은 인간성에 내재하는 교환성향에서 생긴다. 그가 만약 그들 자신의 이기심(self-love)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발휘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자기가 그들에게 해주도록 요구하는 일을 그들이 자기에게 해주는 것이 이익이 된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들의 도움을 얻으려는 목적은 더 효과적으로 달성될 것이다.”(Smith, p. 17).

Sharing Economy든 Commons Economy든 그것의 기초는 인간의 이타성 혹은 호혜성을 전제로 한다. 인류의 본성에 대한 스미스의 도덕적 해석을 비판하며 그 자리를 이타성으로 대체한다. 이타성에 대한 주목이 공유경제의 발현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들이다.

벤클러의 견해는 조금더 흥미롭다. 그는 이기심과 이타심을 반대의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이타심은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과 심리의 한 유형일 뿐이라는 것의 그의 주장이다. http://slownews.kr/16065
<펭귄과 리바이어던>은 이기적인 것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행동들을 설명하기 위한 저작이었다고도 했다. 확대 해석하자면 인간은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하며 또 다른 성격이기도 한 것이다.

위의 견해들을 종합할 때 인간의 본성을 이기적 : 이타적의 개념 대립을 기초로 자본주의와 공유경제를 대립적으로 설정하는 방식은 여러모로 설명의 한계에 직면한다. 이 성격은 대립항이 아니라 총체적 묶음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

그레이브가 부르디외의 입을 빌려 설명하고 있듯, 이타적인 행위 등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단지 비물질적인 어떤 가치를 최대화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라는 설명은 그래서 설득적이다. 비합리적이라는 표현은 불편하지만 부르디외의 설명은 결국 하나의 개념으로 풀어보려는 시도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협력의 가치가 조명 받고 커먼스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변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적 사회경제적 구조가 인간의 본능을 활용하고 발현시키는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이기심과 이타심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기호학의 이항대립으로 생성된 강제된 의미의 대립쌍은 아닌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요약하자면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어서 자본주의가 정당화되고 인간의 본성이 이타적이어서 비시장적 커먼스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경제시스템의 변동이 인간의 본성을 자의적으로 개념화하고 해석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레이브가 142쪽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맑스의 가치 이론 같은 것을 인간 사회 대부분 혹은 18세기 이전에 존재했던 사회들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할까”라고 되묻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이타+a’로서 새로운 언어에 의해 호명되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Smith, Adam.(1776). Wealth of Nation. 김수행 옮김. 2007. 국부론. 비봉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