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언론학회 가을정기학술대회 토론문으로 작성됐습니다. 잡지의 혁신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근대사 속 사례로서 최남선의 ‘소년’을 주목한 것입니다. 국내에서 근대적 잡지 산업을 일으키고 혁신을 주도했던 그의 초기 노력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취지입니다. 최남선의 친일행위를 미화하거나 옹호할 의도는 전혀 없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참고로 최남선은 이광수와 함께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돼 있습니다.


들어가기에 앞서

1908년 11월 최남선의 월간 <소년> 창간호.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침체하고 있는 국내 잡지의 디지털적 재구성 혹은 산업적 부활을 위해 과거를 되새기는 건 흥미로운 작업입니다. 영미권의 잡지 혁신 사례를 관찰하며 더 나은 대안을 발견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과거의 성공과 실패 사례로부터 새로운 출발점을 찾아내는 것 또한 의미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근대 잡지의 원형을 다시금 들춰봄으로써 잡지의 역할 모델이 어떻게 변모해왔고 무엇을 놓쳐왔는가를 확인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과거는, 또 한번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잡지 관계자들에게 그 방법론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려줍니다. 역사적 분기를 가능하게 했던 본질적 조건이 무엇이었는지를 분석해낼 수 있다면 지금의 접근법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도 있을 겁니다. 이 글은 국내 종합잡지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최남선의 월간 ‘소년’과 그것의 발행 기관으로서 ‘신문관’을 콘텐츠, 기술, 비즈니스 3가지 측면에서 분석함으로써, 잡지 생태계의 부활을 위해 현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를 탐색해보려고 합니다.

월간 ‘소년’의 생산 주체 변화와 플랫폼 ‘신문관’ 혁신적 인쇄기술

1) 생산 주체의 변화로서 소년 필집 그룹 : 비세도가 출신의 유학 전문지식인 그룹

월간 '소년'의 대표 필진. 이른바 동경삼재라는 당시 10~20대 유학파. (출처 : 한겨레)

국내 민간 잡지의 효시는 1908년 11월 최남선에 의해 창간된 월간 ‘소년’이었습니다. 물론 ‘소년’ 이전에 청년을 위한 잡지가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양재건의 ‘소년한반도’(1906년 창간)처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잡지도 발행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대 세도가와 선비 중심의 필진 구성으로 실제 소년층에 대한 소구력이 낮았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월간 ‘소년’이 발간된 후 3년차 가량부터 이광수, 홍명희 등이 결합합니다. 이른바 ‘동경삼재’입니다.  명망가 출신의 홍명희와 달리 이광수는 몰락 양반 집안 출신입니다. 최남선은 중인 최헌규의 아들이었죠. 그리고 이들 핵심 필진들은 다수가 일본 유학파로 구성이 됐습니다. 전통적인 선비, 세도가, 중년층으로 구성된 소년한반도의 필진들과는 다른 지식 크리에이터 그룹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청년을 타깃으로 삼았으면서도 이인직, 이해조, 양재건 등을 필진으로 삼아 한자중심으로 발행한 소년한반도와 달리 월간 소년은 당시의 MZ세대라 할 수 있는 최남선(당시 10대말),  이광수(10대 말), 홍명희(20대)로 주체 변화를 시도한 점은 ‘세대 교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독자를 위한 혁신적 인쇄기술의 활용

소년은 최남선의 개인 출판사격인 ‘신문관’에서 인쇄되고 발행이 되었으며, 연간 구독료는 50전으로 당대 설렁탕 다섯 그릇 수준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약 5만원 정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신문관은 당시 가장 뛰어난 인쇄 기술 설비를 갖춘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박진영(2009)의 서술을 통해 당시 신문관의 인쇄기술 수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부친 최헌규에게서 거액의 자금을 받아 쥔 최남선이 일본에서 최고의 인 쇄 설비와 온갖 책을 사들여 신문관을 창립했다는 점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신문관에 주목해야 할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놓여 있다. 신문관에서 발행된 책들은 잡지와 단행본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세련된 장정과 표지 디자인, 여러 규격으로 변형된 판형, 다양한 크기와 선명한 활자, 사진 과 그림은 물론 다채로운 컬러 장식 문양까지 동원한 인쇄의 질적 비약, 그리고 우수한 지질과 잉크 사용 등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 점은 신문관 보다 앞서 문을 연 보성사(普成社)나 그 뒤에 출현한 여느 출판사에서도 쉽게 따라잡지 못한 매력 가운데 하나다. 당대의 대표적인 일간지 대한매일 신보조차 지면 혁신을 위해 신문관에 활자를 주문했다는 사실은 신문관의 위상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한 가지 일화일 터다. 16) 요컨대 신문관은 당대 최고의 편집 및 인쇄 역량을 자랑할 만했다. 신문관의 운영 방식과 인쇄부의 독립에 주목한 것도 그래서다.”(박진영, 2009, p.19)

최남선의 장손, 최학주의 중앙매거진 인터뷰에서도 인쇄 기술의 혁신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발견됩니다.

“조판 활자 관련 하드와 소프트를 일본에서부터 통째로 들여왔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일본 기술자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으면서 스스로 인쇄소 공원이 되어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잡지 하나 잘 만들겠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글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한민족의 문화·역사·의식을 개척하고 지켜나가자는 의미에서의 전방위 문화계몽 활동입니다.”

월간 ‘소년’은 창간 취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소년을 타깃 독자로 했습니다. 매일신보로 상징되는 대중지 성격의 일간 신문과는 다른, 특정 틈새 영역의 틈새 독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기 국내 잡지의 전략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비록 그 내용은 소년이라는 특정 타깃 독자 그룹을 넘어 성인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우리 대한으로 하여금 소년의 나라로 하라, 그랴 하면 능히 이 책임을 감당하도록 그를 교도하여라’라는 창간사에서도 담겨 있듯, 특정 타깃 그룹을 명확히 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당대 민간 잡지의 탄생은 신문관이 보유한 탁월한 인쇄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앞선 인쇄 기술에 바탕해서 발행되고 확장됐습니다. 월간 ‘소년’이 필자풀의 한계와 배포 기반의 취약성 등으로 인해 많은 수의 독자를 초기에 확보하지 못한 채 1911년 폐간에 이르게 됐지만, 타깃 독자의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한 편찬 스타일 구성은 지금도 주목해 봐야할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라고 할 것입니다. 특히 본문 안에 삽화와 사진을 넣어 편집했던 편집물의 구성 방식은 충분히 세련된 시도였을 뿐 아니라 기술적 뒷받침이 가능했기에 구현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선진화한 잡지 발행과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가능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최남선이 일본에서 인쇄 설비를 사들인 곳은 도쿄 교바시(京橋)의 긴자(銀座)에 있는 슈에이샤(秀英舍)로 알려져 있다. 대영 제국을 넘어서겠 다는 야심만만한 꿈을 담아 붙인 이름으로 당시 도쿄에서는 제일 크다는 인쇄소였다. 최남선은 이곳에서 견습공 노릇을 하며 인쇄 기술을 배웠고, 귀국할 때에는 두 명 혹은 다섯 명의 기술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월간 ‘소년’이라는 잡지는 일본 유학 중 터득하고 경험한 인쇄 기술과 잡지 발행의 문화를 바탕으로 탄생할 수 있었으며, 전국적 배포망을 구축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후행됐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할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강조점 : 인쇄 기술의 혁신없이 타깃 그룹에 최적화한 월간 ‘소년’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월간 ‘소년’의 강연회 ‘소년강화회’와 일상 재조직화 실험

‘소년’은 창간 취지를 실현하기 위한 방식으로서 강연회와 일상 변화를 위한 실용적 템플릿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잡지가 지닌 타깃 중심성과 심층성, 내용물 구성의 다양성을 십분 활용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1910년 2월 개최될 예정이었던 제1차 ‘소년강화회’(공개 강좌)는 월간 ‘소년’의 부가사업이자 비전 실행 전략이었습니다. 콘텐츠 발행에 머물지 않고 공개 강좌를 개최함으로써 ‘내용의 실천’, ‘일상의 재조직화’를 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구상은 당시 일제 통감부의 금지조치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아래 두번째 그림 ‘프랭클린의 일지’도 당대 잡지의 역할 모델 확장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독자로서 소년들이 일상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바꾸기 위해 실제로 참고하거나 실행할 수 있는 실제적 팁을 사례를 통해 제공했다고 해석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신문관’이라는 콘텐츠 플랫폼이자 혁신 크리에이터들의 네트워크 허브

지금은 철거돼 사라진 '신문관'.

월간 ‘소년’을 발행했던 인쇄기업 ‘신문관’은 인쇄시설의 입주한 공간이자 인쇄기술이 작동하는 플랫폼이었고, 콘텐츠를 발행하고 편집하는 편집국이었으며, 다양한 네트워크의 허브이기도 했습니다. 신문관이라는 공간이 왜 플랫폼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래 서술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신문관은 출판 기구로서는 물론 청년학우회의 운동본부이기도 했고 조선광문회의 총 지휘소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문화와 학술, 실천 운동의 메카를 꿈꾸었던 셈이다. 실제로 최남선과 신문관을 구심점으로 삼아 광범위한 네트워크가 구축되고 전국의 문화 역량이 한데 모아졌다.”(박진영, 2009, p.40)

현대의 잡지와 잡지사는 자신의 역할 모델을 콘텐츠의 발행으로 축소시켜왔습니다. 광고의 황금시대를 거치면서 커뮤니티의 기능을 왜소화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근대 초기 잡지는 달랐습니다. 다양한 필진들이 모여 교류하고, 토론하고 나아가 새로운 버티컬을 만들어내는 네트워크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동일한 관심사를 지닌 그룹들이 한 데 모이는 커뮤니티 역할도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를 통해서 독자와 필자 기반을 확대하고, 비전과 미션을 함께 모색하는 콘텐츠 공동체의 역할도 수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기반에는 콘텐츠가 존재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콘텐츠를 더 많은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인쇄기술과 배포기술이 있었기에 모여들 수 있었을 겁니다. 안창호의 청년학우회가 월간 소년의 부록 형태로 1909년 9월호에0 ‘청년학우회보’를 발간할 수 있었던 것도 신문관이 지닌 수준 높은 인쇄기술과 배포망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박용규, 2011. p.472). 물론 독자층을 일정 수준 확보한 ‘소년’이 하나의 플랫폼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소년’을 통해 본 현대 잡지의 뉴스레터로의 전환 가능성

위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시피, 국내 최초의 민간 잡지는, 콘텐츠의 발행에만 머무르지 않고, 독자들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편집과 편집 외적 노력을 동시에 기울였습니다. 비록 그것의 계몽주의의 연장선 상에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현대 잡지 문화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도 존재하지만 강연회와 같은 부가 혜택 및 커뮤니티 구축과 메시지 전파의 추가 채널 확보 노력 등은 지금의 잡지들도 참고해야 할 사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타깃 독자(가독성, 라이프스타일 최적화)를 위해 당대 발행 기술에 올라탈 필요가 있다
  • 부록 등을 포함하는 적극적인 버티컬 개발 전략이 필요하다 : 청년학우회 ‘청년학우회보’
  • 배포 유통망 확대를 위한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 콘텐츠 발행을 넘어선 비전 실행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 필진 그룹의 확대를 위해 스스로가 네트워크 허브가 돼야 한다

결론적으로 유료 뉴스레터 모델을 통해 구독 수익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그곳이 네트워크의 허브가 작동할 수 있는 새로운 설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뉴스레터는 타깃 독자의 발굴과 만족도 개선을 위한 향상된 프로덕트로서의 특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뉴스레터가 독자 기반의 수익 창출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지속성이 담보되기 어렵습니다.

덧붙이며 : 커뮤니티 플랫폼으로서 뉴스레터 플랫폼의 한계

더버지 기자 출신 케세이 뉴턴의 사례를 통해서 서브스택이라는 뉴스레터 플랫폼의 한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커뮤니티도 한몫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디스코드라는 커뮤니티 툴에 동료 기자들과 함께 'Sidechannel'이라는 걸 개설해서 운영해 왔습니다. 이 공간에 마크 저커버그를 초대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강력한 커뮤니티가 유료 전환의 동인으로 작동했다고 했습니다. 통상 이를 저는 부가 유익(Value Added Benefit)이라고 부르는데요. 유사한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대화하고 정보와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은 성장과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를 일찌감치 그는 간파하고 있었던 겁니다. 오죽하면 "디스코드는 저널리스트들이 자신에게 주는 초능력"이라고까지 상찬했을까 싶기도 합니다.”

소년의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뉴스레터 그 이상의 플랫폼 구축되고 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뉴스레터는 잡지로 구현할 수 있는 다양한 역할 모델 중 콘텐츠 발행 플랫폼에 한정됩니다. 필진과 독자와의 교류, 커뮤니티의 구축을 통한 비전의 실행 등은 뉴스레터 플랫폼만으로는 구현하기 어렵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케세이 뉴턴의 시도처럼 커뮤니티 플랫폼이 통합될 필요가 있고, 필진들끼리도 협업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기반이 제공돼야 합니다.

참고 문헌

  • 박용규. (2011). 최남선의 현실 인식과 '소년'의 특성 변화. 韓國言論學報, 55권 1호
  • 박진영. (2009). 창립 무렵의 신문관 (新文館). 사이間 SAI, 7, 9-46.
  • 권보드래 등 (2007). 소년과 청춘의 창 : 잡지를 통해 본 근대 초기의 일상성
  • 한국근대문학 해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