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언론중재위원회가 매월 발행하는 언론사람 3월호에 제가 기고한 글입니다.

코로나19가 한창 확산될 무렵, 프랑스에서는 유전적, 인종적 특이성으로 인해 동양인들만이 코로나19에 감염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어느 언론이나 할 것 없이 팩트체킹에 나섰지만 이 루머가 진실로 확증될 만한 근거는 부족했다. 사실이 아니라는 저널리즘의 판정을 받았지만 이 소문이 잦아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프랑스인들의 그릇된 믿음을 강화한 그 이면엔 유럽인들의 코로나19 감염자가 당시까지만 해도 전무하다는 통계적 사실로서 ‘팩트’가 존재했다. 기실, 기자들에게 팩트는 신성한 존재다. 진실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서 팩트는 모든 저널리즘 행위의 출발점이라는 강한 믿음이 100여 년 간 언론계를 지배해왔다. 1850년대 와이어 뉴스 서비스의 출현으로 팩트의 위상이 급격히 높아진 이후 팩트는 비판할 수 없는 저널리즘의 숭고한 성역이 됐다. 하지만 팩트는 그 자체로 진실이 될 수 없다. 진실을 구성하는 작은 퍼즐 조각에 불과하다. 앞선 코로나19 루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시피 적지 않은 허위조작정보의 바탕에는 부인할 수 없는 팩트가 존재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팩트의 퍼즐 조각 한두 개만이 들어있다. 허위조작정보의 생산자들은 이 작은 팩트 한두 개에 살을 덧붙이고 포장을 입혀서 거대한 거짓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진실인양 퍼뜨린다. 심지어 그들이 인용하는 팩트들의 다수는 신뢰할 만한 언론사들이 보도한 것들일 때도 많다.

저널리스트들의 믿음을 형성하고 있는 팩트 중심주의는 진실뿐 아니라 거짓을 구성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도 제공한다. 저널리즘 의식이나 취재 역량이 부족한 허위정보 생산자들은 키보드 앞에 앉아 몇 번의 뉴스 검색을 거쳐 허위조작정보를 꾸며낸다. “논란“, ”공방“이라는 제목 아래 보도된 팩트들은 거짓임이 분명함에도 발화자 행위의 사실성으로 인해 진실처럼 둔갑한 뒤 허위조작정보의 원료로 활용된다. 넓게 보면 이는 랄프 퓰리처가 1912년에 언급했던 ”정직한 부정확성“의 대표적인 사례일지도 모른다. 다시 강조하지만 팩트 그 자체는 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다만 반박, 검증, 계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귀중하게 여긴다. 그것을 귀하게 여기되 ‘주의‘(ism)화 하면 안되는 까닭이다.

대안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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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포스트는 448페이지 분량의 뮬러 리포트를 보도할 때 팩트만을 기계적으로 나열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인용문을 열거하며 복잡한 사안을 단순화하는 데에도 몰두하지 않았다. 팩트를 전체의 퍼즐 속에서 제 위치에 배치하기 위해 내러티브를 바꿔냈다. 그리고 과거 기사, 보고서 등 부가 정보를 곳곳에 덧붙이며 하나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이 자체가 진실이 될 순 없겠지만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로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을 그들은 아끼지 않았다.

팩트가 진실을 향하도록 하려면 워싱턴포스트의 사례처럼 팩트를 제 위치에 올려놓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넓은 맥락 안에서 팩트가 해석될 때 팩트는 힘을 얻게 된다. 하지만 엉뚱한 곳에 너저분하게 뿌려놓은 팩트는 다른 거짓된 맥락과 결합하면서 거대한 허위정보로 이어지게 된다. 신문이 하나의 팩트에 가치를 더하기 위해 편집의 가치를 입혔던 것처럼, 디지털의 내러티브도 팩트가 진실을 가리킬 수 있도록 ‘구성의 가치’를 덧붙일 필요가 있다.

저명한 저널리즘 학술지 ‘컬럼비아 저널리즘 리뷰’는 2019년 가을호에 ‘팩트를 넘어서’라는 에세이를 게재하면서 이렇게 소개한 적이 있다. “우리가 잘못된 정보의 먹구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어떤 희망을 가지려면, 우리 모두는 더 넓은 내러티브를 이해해야 할 책임을 져야 한다. 팩트에만 의존하는 것은 팩트에도 공정하지 않다. 언론인으로서 우리는 스토리가 살아 움직이는 생태계를 고려해야 하고, 팩트를 둘러싸고 있는 거짓을 인식해야 하고...”라고. 팩트를 둘러싼 거대한 진실의 박스를 알려고 노력할 때에만 팩트는 저널리즘적 가치를 지닐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일 거다.

이 고된 작업은 트래픽을 얻을 수 있는 것이면 모든 것을 기사화해야 한다는 인식으로는 구현될 수 없다. 팩트를 맥락의 퍼즐판 위에 올려놓는 작업은 상당한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가디언과 르몽드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좋은 전범이다. 지난해 가디언은 주간 기사 생산량을 1/3이나 줄이고도 구독자나 방문자수를 늘리는데 성공했다. 프랑스의 르몽드도 기사수를 25%나 줄였지만 오히려 디지털 구독자는 11%나 늘어났다. 이들은 저널리즘과 비즈니스 양측면 모두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잡다한 뉴스의 생산을 줄이고 맥락적 기사를 생산하는데 집중하면서 이러한 성적표를 받아들 수 있었다.

맥락과 결합되지 않은 팩트들, 사실여부조차 걸러지지 않은 작은 팩트들의 조각들이 트래픽 유발을 위해 과도하게 생산되면서 허위조작정보의 미끼가 되어 온 사실을 우리는 가볍게 여겨선 안된다. 그러한 유형의 기사량을 줄이되, 더 넓은 맥락이 첨부된 가치 있는 저널리즘 생산물에 집중하는 것이 허위조작정보의 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이 가디언이나 르몽드처럼 수익의 위기 없이 더 많은 독자들을 신뢰의 브랜드 앞에 모이게 하는 묘안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