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드벤처 게임의 스토리텔링

‘원숭이섬의 비밀’은 어드벤처 게임의 역작으로 꼽힌다. 1990년 출시된 버전이 10년이 지난 뒤 리메이크될 만큼 흥행도 성공적이었다. 해적이 되고자 하는 가이브러쉬가 3가지의 관문을 뚫고 유형 해적 리척에게서 여자 친구를 구해낸다는 줄거리는 뻔해 보이긴 했다. 하지만 스토리가 전개되는 과정 곳곳에 삽입된 유희적인 요소와 코믹한 대화적 장치는 사용자의 몰입을 높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어드벤처 게임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어드벤처 게임은 롤플레잉 게임과 달리 ‘닫힌 이야기‘ 구조를 특징으로 한다. 닫힌 이야기 구조는 스토리 전개의 자유도를 낮추지만,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인터렉션은 결말에 도달해가는 과정에 긴장과 재미를 선사한다. 닫힌 스토리 구조임에도 몰입을 유발할 수 있었던 건, 인터렉션 즉 상호작용의 힘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원숭이섬의 비밀은 그래서 대화형 어드벤처 게임의 대표로 위상을 갖는다(최삼하/김경식. 2005). 사용자가 주어진 예시문을 선택해 가이브러쉬가 질문하도록 명령하면, 게임 내의 다른 캐릭터들은 설정된 예시문에 따라 답변을 내놓는다. 제한적인 질문과 제한적인 답변의 상호작용이지만, 여기에 게임의 몰입 요소들이 빛을 발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당신은 해적인가요?”라는 질문과 “해적들아 엿이나 먹어”라는 질문이 선택지로 주어졌을 때, 사용자의 판단에 따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면, 전혀 다른 답변들이 제시되면서 재미 요소가 극대화된다.

캐릭터가 죽거나 소멸하지도 않는다. 어떤 질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체적인 줄거리가 바뀌지도 않는다. 이러한 닫히 이야기 구조 속에서도 전혀 다른 반응과 마주하게 되면서 사용자들은 게임의 재미에 흠뻑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사용자의 선택한 질문에 따라 몰입과 재미의 정도가 가감되는 상호작용적 스토리텔링의 특성을 원숭이섬의 비밀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ai 스피커에서 bbc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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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가 AI 스피커 전용으로 곧 선보이게 될 인터렉티브 오디오 드라마는 ‘원숭이섬의 비밀‘과 여러 측면에서 닮았다. ’The Inspection Chamber’라는 제목의 이 파일럿 드라마는 닫힌 이야기 구조 속에서 상호작용을 몰입의 핵심 요소로 활용한다. BBC R&D팀은 “우리는 스토리와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봤다”라면서 이를 위해 ‘Choose Your Own Adventure’ 시리즈 같은 샘플을 참조했다고 설명했다.

‘Choose Your Own Adventure’는 에드워드 패커드라는 작가가 20년 간 써내려간 게임북으로 스토리 중간에 질문을 삽입함으로써 어린이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는 형식을 취했다. 주인공은 항상 ‘당신‘이라는 시점을 채택했고,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상황을 수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초기 롤플레잉 게임이 이 구조를 빌려왔다는 것이 당시의 평가였다.

BBC는 이러한 구조에 착안해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내고 이를 AI 스피커 위에 올려놓았다. ’The Inspection Chamber’는 닫힌 이야기의 구조 속에서 원숭이섬의 비밀처럼, 그리고 ‘Choose Your Own Adventure’처럼 사용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질문에 따라 3가지의 다른 내용 전개가 허락된다. AI 스피커라는 디바이스와 이 디바이스를 대하는 사용자의 상황적 맥락을 고려해 스토리에 등장하는 캐릭터도 3명으로 한정했다. 또한 시간도 20분으로 짧게 설정했다.

물론 전체적인 줄거리가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닫혀있다. 대화형 어드벤처 게임을 마치 인터렉티브 오디오 콘텐츠로 재조합하고 변형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다른 장르의 이야기 구조를 새로운 디바이스의 특성과 결합함으로써 네이티브한 인터렉티브 오디오 드라마를 탄생시킨 것이다. 인터렉티브 오디오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가겠다는 그간의 연구와 포부가 이 드라마에 농축돼있다고 볼 수 있다.

뉴스의 스토리텔링에 주는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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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spection Chamber’는 AI 스피커에서 뉴스 콘텐츠가 어떠한 스토리 구조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현재 시범적으로 서비스되고 있는 일방향의 뉴스 요약, 혹은 브리핑류는 기존 미디어의 스토리 체계를 재매개하거나 재현한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재현은 곧 창발의 형태로 진화하게 마련이다(Hayles. 2010/2016, 51~52). 진화의 메커니즘은 명확하다. 이전 미디어의 체제와 새로운 미디어 체제의 결합과 조합에서 진화의 방향이 설정된다는 것이다.

BBC가 게임북이라는 구미디어 혹은 게임이라는 이종 미디어의 스토리 구조를 참작해 AI 스피커 전용 콘텐츠를 만들어냈다는 사실도 이를 방증한다. 창발은 전혀 다른 구조의 창조적 고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 미디어와 뉴 미디어의 체계를 창조적으로 조합한 결과물이 가능성이 더 높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뉴스의 창발 과정도 이와 다르진 않을 것이다. 뉴스는 뉴스 그 자체의 포맷만으로 창발의 상태로 나아갈 수 없다. 이종 미디어 또는 구 미디어의 스토리 구조를 결합하고 조합함으로써 AI 스피커 콘텐츠의 새 전형을 만들어갈 수 있다. 사건 기사와 추리 소설을 결합한다거나 퀴즈와 뉴스를 접합함으로써 AI 스피커 전용 뉴스 스토리텔링을 구상해낼 수 있다.

저널리즘 정의-실현 방식에 대한 유연한 사고

뉴스의 스토리를 전개하는데 있어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이를 통해 내용의 깊이로 접근해가는 구조는 손쉽게 상상해볼 수 있는 AI 스피커 콘텐츠의 유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AI 스피커를 사용하는 특정 시간대를 표적으로 삼아, 복잡한 뉴스를 긴장감 높은 상호작용 구조 속에서 몰입감 높게 스토리텔링을 설계하는 작업들도 언론사들이 고려해야 할 작업이다.

NPR은 라디오와 인쇄는 다르다고 했다. 이 명제를 인식시켜 사고의 전환을 끌어내는 것이 그들 교육 훈련의 주 목표다. 라디오는 또한 인터렉티브 오디오와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라디오 종사자가 유리한 위치에 있긴 하지만, 그것이 항상 창발의 새 지점으로 인도하지는 않는다. 자주 언급하지만 익숙한 구 미디어의 사고 구조가 오히려 레거시의 무게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다.

결국 다양한 특성을 지닌 스토리텔링의 구조를 뉴스와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유형의 뉴스 스토리텔링을 만들어가는 작업이 요구된다. 이것이 초기 인터넷에서 스노우폴과 같은 몰입형 디지털스토리텔링(immersive storytelling)를 탄생시키는 과정이었고 결과였다. AI 스피커에 최적화된 스토리텔링도 이러한 과정 속에서 창발의 지점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뉴스 형식의 전형성에 매몰되지 않고 저널리즘의 기능적 정의에 관심을 가진다면 새로은 스토리텔링의 창발적 상태에 보다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널리즘에 대한 정의나 실현 방식에 대해 유연한 사고를 가지 필요가 있다.

참고 문헌들

  • 최삼하, 김경식. (2005). 게임캐릭터의 실시간 대화시스템에 대한 고찰. 게임&엔터테인먼트 논문지, 1(1), 39-46.
  • Hayles, N. K. (2010). My mother was a computer: Digital subjects and literary text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이경란/송은주 옮김.(2016). 나의 어머니는 컴퓨터였다. 아카넷.